[탐사일보=정병호 기자] 사랑했기 때문에 찍었다고 했다.
서로를 믿었기에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장면은 믿음이 무너진 순간, 협박의 카드로 바뀌고 누군가의 삶을 옥죄는 족쇄가 되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촬영된 영상은 디지털 성범죄의 출발점이 되었다.
최근 데이트폭력 피해 사례들을 들여다보면, 유독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사적 영상물'이다.
이는 불법 촬영이 아닌 관계 안에서 '사랑'과 '동의'라는 이름으로 생성된 영상물이다.
하지만 그 영상은, 이별을 거부하고 관계를 통제하기 위한 협박 수단으로 기능한다.
이는 단순한 분노 표출이나 감정적 대응이 아니다.
관계가 종료되는 지점에서 폭발하는 통제 욕구와 지배 본능의 표출이다.
이를 기점으로 그들은 '연인'에서 '피해자와 가해자'로 탈바꿈한다.
가해자는 영상이 존재 자체를 무기로 삼아 피해자에게 '헤어질 권리'라는 선택지를 빼앗으려 한다.
사랑이란 가면을 쓴 그 욕망을 추적하다 보면 하나의 질문에 도달한다.
그들은 왜 그런 영상을 촬영했을까?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피해자 중 16.2%는 촬영 피해를, 4.8%는 유포 협박을, 2.9%는 실제 유포 피해를 경험했다고 답했다.
특히 '동의'가 있었던 피해자의 경우에도 자율적인 선택이었다고 보기 어려운 정황들이 나타났다.
"거절하면 싸움이 날까 봐", "사랑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일까 봐"라는 응답이 반복됐고, 이는 심리적 압박과 관계 내 권력 불균형이 작동한 결과로 풀이된다.
심리학은 이 욕망의 실체를 '소유 본능'과 '불안정 애착'이라는 키워드로 설명한다.
사랑이라는 관계 안에서 통제력을 확인하려는 충동, 상대를 기록함으로써 관계를 붙잡아두려는 심리가 촬영 행위로 이어진다.
특히 자기애적 성향이 강한 사람일수록, 타인을 통제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구가 짙게 드러난다.
'너와의 추억을 영상으로 남기고 싶다'는 제안이 실제로는 '권력을 확보하려는 시도'로 변질된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감정 종속(emotional dependency)' 또는 '관계 내 인지 왜곡(cognitive distortion)'이라 부른다.
연인 관계 안에서 '사랑하니까 이 정도는 해줄 수 있다'는 신념, '거절하면 관계가 깨질 수 있다'는 불안은 스스로 자율적이라 믿었던 선택을 실상은 심리적 복종으로 이끌 수 있다.
범죄학은 이러한 상황을 단순한 소유욕이 아닌 통제의 수단으로 구조화된다는 점에 주목한다.
촬영 요구는 권력의 비대칭을 전제로 한다.
가해자는 그 순간부터 심리적 우위를 점유하게 된다.
촬영물이 존재하는 한 피해자는 언제든 협박당할 수 있는 위치에 놓이며,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폭력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두 관점에서 바라봤을때 도달한 결론은 같다.
촬영은 애정의 표현이 아니라 통제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사랑의 증표라 믿었던 그 장면은, 관계가 끝난 뒤에도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 되어 피해자의 삶을 억압한다.
피해자는 가해자와의 관계를 정리하는데서 끝나지 않는다.
삭제되지 않은 영상은 웹 어딘가를 떠돌며, 언제든 다시 소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면죄부가 아니다.
우리는 이제, 카메라를 든 손을 경계해야 한다.
사랑을 말하며 렌즈를 들이대는 사람을 경계해야 한다.
그 손끝이, 한 사람의 삶을 무너뜨릴 수 있다.
